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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합니다. 

 

https://cafe.daum.net/everyday1bean     

다음카페 : 붓다스쿨

 

 

가치있는 행위를 했다면 거듭 되풀이할 것이요 그 가운데서 희열을 구해야 하네. 가치 있는 일이 쌓이면 더 없이 행복하리니.
<법구경이야기 >

https://youtu.be/R0Ju5csysCo

 

행복경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배우자와 자식을 잘 돌보며 일을 할 때 혼란하지 않은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다

 

왕생게 20송
안락 세계는 청정하여 항상 때가 없는 법륜을 굴리네 화현하신 부처님과 보살들의 광명 수미산이 머무는 것과 같다
밝게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_()()()_

 

입보살행론 115일차

8:66 고약한 냄새를 내뿜는 것은 탐내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어째서 이 무가치한 것을 좋아하여 거기에 향수를 바르는가?

8:67
그러나 전단의 좋은 향기가 있다 하더라도 이 몸에서야 어떻게 생길 수 있겠는가.
전단향이 아닌 다른 악취가 날 뿐인데 어째서 이 몸뚱이에 집착하는가.

8:68
긴 머리털과 손발톱 입에서 고약한 악취가 나고
시궁창 같은 냄새가 밴 것이 몸의 실체라면 사람의 몸은 정말 혐오스러운 것 아닌가.

8:69
몸을 치장하려 그렇게 애쓰는 것은 나중에 자기 자신을 해치기 위해
사용된 칼을 가는 거나 다름없는데 사람들은 겉만 꾸미느라 정신 없다네.

8:70
단지 해골만 보고서도 공동묘지를 혐오한다면
움직이는 해골로 가득한 마을이라는 묘지는 왜 좋아하는가?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_()()()_

 

보살수업22 #해체주의 #실체 #생존과행복 
  
(3) 몸의 정묘(精妙)한 본질이 없음을 생각한다
5:62 먼저 자신의 마음속으로 이 몸뚱이에서 피부부터 순서대로 나누어 보라.
     지혜의 예리한 칼로 살도 뼈에서 분리시켜 보라.

#해체주의 

붓다는 실체 없음의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해체주의의 방법론을 교육하셨습니다. 

지혜의 예리한 칼로써 얼버무리고 뭉뚱그려지는 개념들을 잘게 잘게 쪼개는 기법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뭉쳐서 볼 때는 마치 실체와 자아가 있는듯 보이는 존재도 

해체하는 순간 오직 허공 뿐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 상식으로 보더라도 모든 물질은 허공과 같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책상을 만질 때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책상이라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책상과 손이 서로 밀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이 그 책상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는 점과 촉감의 측면에서 뚫지 못한다는 점 등을 

총 동원하여 사람들은 책상이라는 물질의 실체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이 인간 감각의 한계이고, 개념화된 지식의 오류입니다.
해체하면 어떻게 되나요? 쪼개고 쪼개집니다. 작게 해체하면 물질의 최소 단위가 나옵니다.

불교의 설일체유뷰는 교리상 이 최소단위를 #극미 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돌턴의 원자설 배우지 않았습니까? 원자라고도 불렀습니다.

최근에는 #쿼크 라는 단위라고도 부릅니다. 양자라는 표현도 씁니다.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 없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어차피 더 쪼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까요. 
중요한 점은 얼마나 쪼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쪼갰을 때 드러나는 성질입니다. 

쪼개보니 사실 물질의 99% 이상은 텅 비어 있다고 합니다. 허공과 같다고 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그곳을 실체 있는 무엇인가가 점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시세계로 가면 존재를 '확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확률... 
이런 확률적 입자들로 이루어진 책상, 컴퓨터,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과 우주에 무슨 실체가 있을까요? 
                           
5:63 그리고 뼈도 깨뜨려 나누어 놓고 골수 내부까지도 면밀히 살펴보라.
     여기 어디에 견실한 법의 실체가 있는지 그대 자신이 깊이 관찰해 보라.

#실체

실체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서 먼저 오해를 풀고 넘어가죠. 

반대면에서 시작하면, 실체가 없다는 말은 곧 아무것도 없다는 말과 다르다는 점부터 짚어보겠습니다. 

붓다가 말하는 무아는 몸과 마음 둘 다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에 주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보통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체는 없지만 경험은 있다.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
첫째, 몸과 마음의 경험은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 경험은 주체 없이도 조건이 갖추어지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촛대와 심지 그리고 산소와 불이 만나면 촛불이 생깁니다. 조건이 형성된 것입니다. 

하지만 촛불이라는 자아는 없습니다. 주체 없이도 조건만 형성되면 얼마든지 경험은 지속됩니다.
둘째, 이 지속되는 경험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직접 촛불 명상을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초를 켜놓고 10분, 1시간 동안 지켜보세요. 단 한 순간도 멈춤 없이 촛불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오직 인간의 개념 속에서만 멈춘 촛불이 허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실체가 있다는 착각은 이 두 가지 오류를 포함합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자아라는 주체가 있다는 착각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교육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고정된 자아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 방식이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행복을 파괴하는 가장 오래된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염병을 통해 중생은 무한한 윤회의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진정으로 이고득락을 원한다면 이 자아중심주의의 질병을 고쳐야 하는 것을 필연입니다. 
                           
5:64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거기에서 아무런 실체도 찾을 수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아직도 집착에 빠져 그대는 이 몸을 지키고 있는가.

#생존과행복

생존과 행복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요? 중생에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생존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의 본능입니다. 

본능 중에서도 두뇌와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는 최우선 본능은 바로 생존입니다. 

이 생존 본능의 뿌리가 바로 자아이고, 이로 인해 중생은 생의 무리에 갇힌 것입니다.
붓다가 이 자아의 허상을 뿌리 뽑으려 하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모든 고통의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매우 허술합니다. 

조금 주먹구구 식으로 조약하게 문제를 그때 그때 땜방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대표적인 것이 생존의 욕구가 행복을 방해하는 다양한 부작용들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의 쾌락은 왜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할까요? 

이것은 생존을 우선하는 두뇌가 선택한 시스템입니다. 

각종 열매를 따서 먹던 인류를 상상해보겠습니다. 

사과 하나를 발견해서 먹었는데 너무 맛이 있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이 행복감이 오랫동안 유지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른 사과를 찾으러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럼 굶어 죽을 위기가 커지게 됩니다. 명백한 생존의 위기입니다. 
두뇌의 시스템이 허술하다는 의미는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생존이 쉽지 않던 시절에 만들어진 두뇌의 시스템이 현시점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 

사실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다. 현 시대에는 숲에서 살던 인간들과 달리 생존이 어느정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생존이 최우선이 아니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두뇌는 이미 자리잡은 본능의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사과의 자리를 

단순한 탐욕의 충족을 위한 명품백이 대체한 상황에서도 이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명품백은 없어도 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쾌락을 짧게 만들어 다시 명품백을 찾아 헤매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풀어 오른 탐욕은 고통을 불러오고 행복을 망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수행자는 이 생존 본능을 역행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수행의 주제는 탐진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스스로 수행자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다양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생존과 행복 중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체크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살아간다면 탐진치가 강해지는 것, 자기중심주의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면 치열하게 역행하여 무탐무진무치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이타적인 마음을 훈련하게 됩니다. 

세상을 구하는 보리심이라는 마음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용하게 됩니다. 

스스로 솔직히 점검해보세요. 생존이 중요한가요? 아니면 행복이 중요한가요?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