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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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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 붓다스쿨

 

 

인색한 사람은 결코 천상에 오르지 못하리. 어리석은 사람은 베푸는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네.

현명한 이는 베푸는 데에서 기뻐하니, 그리하여 앞으로도 행복하게 되네. <법구경이야기> 

https://youtu.be/bEgXlx9l3Y0

 

행복경

너그럽게 베풀고 바르게 살며 친구와 친척을 돕고 비나 받지 않을 행동을 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다

 

왕생게 13송
영원히 몸과 마음의 번뇌 여의고 즐거움누리는 것

항상하여 끊임없고 대승선근의 세계 평등하여 싫어한다는 이름조차 없네.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_()()()_

 

입보살행론 155일차
9:81 만일 몸이 손과 모든 다른 부분들 안에 통째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있든지 간에 그 부분들만큼 많은 수의 몸이 있는 것이 되네.
9:82 몸은 내부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는데 어떻게 몸이 손과 다른 부분들 안에 있겠는가.
그것은 손과 다른 부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나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9:83 그러므로 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네. 미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손과 다른 부분들과
관련해서 그들의 특정한 모습 때문에 몸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기둥을 보고 그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네.
9:84 조건들이 모여 있는 한 그 기둥이 사람처럼 보이듯이

마찬가지로, 손과 다른 부분들이 있는 한 몸이 그것들 안에서 계속해서 보인다네.
9:85 마찬가지로, 발가락이 모여 발을 이루는데 어느 것이 발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관절들이 모여 발가락을 이루는데 어느 관절을 발가락이라 할 수 있는가.
9:81 만일 몸이 손과 모든 다른 부분들 안에 통째로 존재한다면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있든지 간에 그 부분들만큼 많은 수의 몸이 있는 것이 되네.
9:82 몸은 내부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는데 어떻게 몸이 손과 다른 부분들 안에 있겠는가.
그것은 손과 다른 부분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나니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는가.
9:83 그러므로 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네.

미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손과 다른 부분들과 관련해서 그들의 특정한 모습 때문에 몸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기둥을 보고 그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네.
9:84 조건들이 모여 있는 한 그 기둥이 사람처럼 보이듯이
마찬가지로, 손과 다른 부분들이 있는 한 몸이 그것들 안에서 계속해서 보인다네.
9:85 마찬가지로, 발가락이 모여 발을 이루는데 어느 것이 발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관절들이 모여 발가락을 이루는데 어느 관절을 발가락이라 할 수 있는가.

 

보살수업50 스님 전 베풀 것이 없습니다 #불안지옥안심극락 #보시와안심  
   
(다) 일찍이 법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사유한다
7:37 나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적도 없고 항례를 베풀어 기쁨을 드린 적도 없으며
가르침에 대한 실천도 다하지 못했고 걸식을 구하는 것도 채워주지 못했다네.

#불안지옥 안심극락

수행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안심하는 것입니다. 안심하기 위해 끝없이 개선하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안심하도록 개선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 수행의 본질입니다. 

여기에 자타의 개념을 포함시키면 대승수행의 본질로 연결됩니다. 

상구보리의 자리와 하화중생의 이타가 바로 그것인데, 

사실은 자타의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나를 구하는 것도, 

남을 구하는 것도 그저 불안에서 안심으로 나아가도록 개선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옥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불안입니다. 이 불안이 지극해진 경험을 지옥이라고 표현합니다. 

극락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반대로 안심의 경험이 극대화된 것 즉, 안락국이 바로 극락입니다. 

그렇기에 불신지옥 예수천국이 아니라 불안지옥 안심극락입니다. 

지옥과 극락은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불안한지 안락한지에 의해 결정되는 주관 세계입니다.

7:38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편안함을 주지도 못했고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괴로움을 없애주지 못했으며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라고는 어머니에게 출산의 고통을 준 것 뿐이라네.

#보살의 수행은 보시

초기불교에서 열반으로 나아가는 공부 방법은 세 가지 주제입니다. 

계정혜 삼학. 계학이란 신업과 구업을 안심에 어울리도록 개선하는 것입니다. 정학이란 의업을 평온하게 가꾸어 안심에 어울리도록 개선하는 것입니다. 혜학이란 신구의 삼업 중 불안의 씨앗이 되는 번뇌들을 모두 뿌리 뽑아 버리는 공부입니다. 

즉, 삼학이란 신구의 삼업을 안심시키는 공부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수행이란 원보리심을 일으켜 육바라밀이라는 행보리심을 실천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의 본질은 결국 보시입니다. 재보시를 위해 보시를 실천하고, 무외보시를 위해 지계와 인욕을 실천합니다. 

더불어 법보시를 위해 정진과 선정 그리고 지혜 바라밀을 갈고 닦습니다. 

원보리심이란 보시하겠다는 다짐이고, 행보리심은 스스로 줄 수 있는 것을 보시하는 과정입니다. 

결국 보살의 수행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보시입니다.

#보시는 항상 가능하다

세 가지 보시는 각각 소유물과 목숨 그리고 진리와 공덕을 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살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줄 수 있는 것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베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핑계입니다. 

세상에 생존해 있는 만 존재는 모두 각자가 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재가자는 재물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 그렇기에 재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 출가자는 재보시가 어렵죠. 재물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그렇기에 무외보시와 법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주고 싶지 않은 것일 뿐.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공은 반드시 큰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정신으로 또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 모두가 불공이다. 

우리가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몸으로 마음으로 혹은 물질로 할 수 있다. 불공할 것은 세상에 넘친다. 

단지 우리가 게을러서 게으른 병 때문에 못할 뿐이다."  
정말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적은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생존의 수단인 재물을 모으지도 못했고, 더불어 진리를 공부하지 않아 법도 모르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무재칠시無財七施는 가능합니다. 

웃는 표정의 화안시와 편안한 말의 언시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심시, 호의의 눈빛을 보내는 안시, 

힘으로 남을 조금이라도 돕는 신시와 앉는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 마지막으로 자신의 공간을 공유하는 방사시까지. 

지금 가진 것이 아무리 적다라도 분명히 줄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보시와 안심 

보시하면 안심합니다. 그럼 극락이 되죠. 인색하면 불안합니다. 나와 주변 그리고 세상을 지옥으로 이끕니다. 

왜 보시하면 안심이 될까요? 

마음의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첫째, 마음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할 때 그 내용물이 무엇이든 주고 받으려면 반드시 인색하게 닫힌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지옥을 만드는 인색함의 감옥에 한 줄기 극락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틈이라도 열리면, 마치 댐이 서서히 무너지듯 지옥의 경계인 철위산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 틈을 만드는 것이 바로 보시입니다. 
둘째, 마음이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보시를 한다는 것은 자타를 분별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유리합니다. 

중생은 적이 아니라 아군을 원합니다. 

그런데 내 것을 보시한다는 것은 상대가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신호를 두뇌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럼 상대도 내 사람의 바운더리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만큼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리는 대상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세 가지 보시 모두 안심의 효능이 있습니다. 재보시는 타인에게 생존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를 받은 타인의 마음은 생존본능이 채워지는만큼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는 보시하는 주체의 두뇌에도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내 생존이 보장되었다는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다면? 더불어 내일 먹을 것을 구할 자신이 없다면? 과연 재보시를 할 수 있을까요? 

보시를 한다는 것은 내 생존이 보장되어 있다고 두뇌에게 말해주는 것이기에 불안에서 안심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됩니다. 
무외보시는 명칭 그 자체의 뉘앙스로 알 수 있듯, 이미 불안에서 구해주는 보시입니다. 

편안한 웃음과 말투 그리고 몸으로 돕는 행위와 다양한 양보를 통해 상대에게 친절하면, 

이 친절은 가장 먼저 내 마음을 안심시키고, 

더불어 이 친절을 목격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한 줄기 안심의 빛을 선물합니다. 한 발자국 극락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법보시 역시 안심의 근본을 선물합니다. 진리를 담고 있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안심의 진동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금강경>을 단 한 줄도 해석하지 못하는 이들조차, 한문 금강경을 읽으며 안심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만나 불안했던 마음이 질문도 하기 전에 안심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진리의 법 그리고 이 법을 지니고 있는 법주는 안심의 근본입니다. 

이를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법보시는 일시적인 안심과 지속적인 안심의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세 가지 보시는 주는 내용물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준다는 행위는 똑같습니다. 

더불어 다른 내용물을 베풀지만, 그 베품이 불러오는 작용도 똑같습니다. 안심 오직 안심 뿐입니다. 

수행의 본질이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2024년 수행주제로 안심극락의 법다운 마음가짐을 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
이제 핑계는 그만대죠. 

가장 고귀한 기회인 인간 삶을 받아놓고, 

이 기회를 쓸데 없는 쾌락 추구와 방일한 태도로 다 낭비하기보다는 

하루 하루 지옥과 같은 불안함을 해결하는 수행을 시작하죠. 매일 매일 조금 더 안심하는 극락을 만들죠. 

이것이 바로 2024년 원빈스님과 인연 닿은 모든 이들에게 권선하는 안심극락 수행입니다. 잊지 마시고 안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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