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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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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리. 

무엇이 자신의 행복인지를 분명히 인식하여 자신의 목표에 일념으로 매진하여야 하리.
<법구경이야기>

 

https://youtu.be/SA0rlg83ufg

 

행복경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배우자와 자식을 잘 돌보며 일을 할 때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다.

 

왕생게 2송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모든 시방에 장애가 없는 광명을 가진 여래에게 귀의하옵고
안락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_()()()_

 

입보살행론 144일차
9:26 (유식) 환영 같은 현상은 마음이 아닌 외부 대상도 아니고 마음 자체도 아니다고 한다면
(중관) 외부 대상과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 그리고 외부 대상과 의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둘 다 그릇된 견해라네.
9:27 의식의 대상이 환영과 같고 존재하지 않듯이 의식 자체도 환영과 같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네.
(유식) 만일 윤회하는 존재가 바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과는 별개의 것이고

허공과 같이 완전히 비어있을 것이라 한다면,
9:28 (중관) 만일 윤회의 삶이 실제로 존재하는 기반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그런 세계에서 태어나고 벗어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에 의하면 마음은 독립되어 있기 때문이네.
9:29 만일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들일 것이니, 마음이 존재한다(唯識유식)고 주장해봐야
무슨 이득이 있는가.
(3) 中觀宗중관종이 공을 깨닫는 것이 소용없다는 논쟁을 파한다
가. 논쟁을 일으킨다
9:30 (유식) 모든 것이 환영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어떻게 번뇌가 그치겠는가.
환영 같은 여자를 만들어 놓은 마술사에게서조차 그녀에 대한 욕정이 일어나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_()()()_


담큐 190 귀한사람의 두 가지 특징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 바라문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세존이시여, 다른 사문, 바라문들 또한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도 각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런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호흡이 주는 선물> 중-

#귀한사람

붓다는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은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귀한 말을 하면 귀한 사람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천한 사람이겠죠?
그럼 귀한 행동은 무엇일까요? 인용한 문장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어떤 이유로든 타인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고집이 적은 자, 비난하지 않는 자는 귀한 사람입니다. 반대라면? 천한 사람일 것입니다.
2023.12.07 오늘도 붓다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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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전 <입보살행론> 

8:32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듯이 죽을 때도 홀로 죽나니,

아무도 우리의 고통을 대신 받아줄 수 없는데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무슨 소용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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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동영상
[법구경 이야기] 태어나자마자 7번 죽음의 위기를 겪은 고사까 장자 이야기 15-3
https://youtu.be/2e-Ew-Nt4qM

 

보살수업39 억념과 정지가 무엇입니까 #메타인지와정지 #향상이불가능 

5:23 마음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여!  억념과 정지를 모든 노력을 다해 지키라고 나는 합장하며 당부하고 당부한다네.

#주의력결핍장애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기본기는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얼빠지지 않도록, 불안하지 않도록 잘 보호하는 것이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 안심 하나면 개선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음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 삶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소 뒷걸음질로 쥐를 잡듯이 우연히 개선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반복되기 어렵습니다. 

반복을 넘어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그럼 단 하나의 기본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념과 정지를 써야 합니다. 

억념이란 주어진경험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먹을 때는 먹기만 하고, 쌀 때는 싸기만 해야 한다고 교육하십니다.

일 할 때 휴가 생각하고, 휴양지에서 일 할 생각을 하는 방일한 상태로는 삶을 즐길 수 없습니다.

억념의 힘으로 주어진 경험에 전념한다면, 일 할 때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놀 때는 놀기만 하겠죠?
주의력결핍장애란 이처럼 전념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지표로 표현해보자면 스스로 주의력을 두고자 하는 대상에 5초 이상 억념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주의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단순히 산만한 것을 넘어서 결핍 장애가 시작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예로 든 이유는 보다 실감이 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이가 지속적으로 삶을 개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실감이 안 될 수 있어서, 표현을 바꿔보겠습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지닌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까요? 

약을 먹어도 조절이 안 되는 상황에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확률은 결국 이 억념과 정지의 힘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의력결핍장애 -> 주의산만 -> 차분함 -> 자각레벨이 높음 -> 집중력이 좋음

5:24 몸에 질병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도 마음대로 할 힘이 없듯이
     마음에 무명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수행에도 힘을 다할 수 없다네.

#메타인지와정지

억념은 념 즉, 사띠를 대상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정지란 메타인지의 힘으로 스스로의 억념을 체크하는 힘입니다. 

더불어 전념하는 방향성이 올바른지를 체크하는 힘입니다. 

사띠의 선순환과 연결해보면 정지란 얼빠져 있는지를 종종 체크하는 깨어있음의 힘과 자기인지의 지혜로 올바름을 

체크하고, 잘못된 오해와 감정을 정돈하는 마음챙김의 힘입니다. 

이렇게 정지로써 경험할 준비가 되면 주의력을 대상에 묶어두고 전념하는 알아차림의 힘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논전에서 억념과 정지를 활용하여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사띠의 선순환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정지의 중요성은 최근 부각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신을 살피는 힘인 메타인지라고 불리는 이 정지는 억념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억념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잠재력이 열리는 효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정지입니다. 

방향을 선택하고, 종종 올바로 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며, 잘못되었다면 교정하는 것까지 모두 정지의 몫입니다. 

그렇기에 정지가 없는 노력은 효율이 떨어지고, 무용지물에 가까우며, 

심지어 거꾸로 가서 부작용만 생기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정체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이에게는 물론 일단 억념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이후에는 분명히 방향의 중요성은 점점 부각됩니다. 

#최선을다하지못함 #깨진항아리 #실천부족 #잔고만까먹음 #향상이불가능 

억념과 정지가 없는 불이익을 논전에서는 다섯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빠져서 산만한 마음이 최선을 다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요. 

둘째, 깨진 항아리처럼 마음은 경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런 경우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배움이 지식과 지혜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셋째, 삶을 바꾸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념하여 익히고, 

이것을 강화하고 기억하는 과정이 충분해져야 합니다. 

이런 정보와 지식 그리고 공감이 가득차서 넘치는 순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삶 속에서 배움이 실천되는 것입니다. 

억념과 정지가 부족하다면 배움을 기억조차 못할테니 실천을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넷째, 새로운 정진을 하지 않기에 과거의 공덕을 깎아 먹게 됩니다. 

위사카 부인이 탁발오신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지 않는 시아버지에게 이런 표현을 합니다. 

'우리 아버님은 식은 밥만 드시는 분입니다!' 식은 밥을 먹는다는 것은 현재의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새로운 공덕을 지을 생각이 없이, 오직 과거에 지은 공덕만을 쓴다는 것입니다. 

새로 들어오는 입금은 전혀 없이 출금만 반복된다면 잔고를 가지고 있더라도 점점 줄어들 것이고, 

결국 마이너스로 나아갈 것입니다. 공덕의 잔고가 줄어들고 사라지면 남은 일은 파멸 뿐입니다. 

이것을 복진타락福盡墮落이라고 합니다.
다섯째, 앞의 불이익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향상은 불가능합니다. 

돈을 벌지도 않고, 탐욕에 사로잡혀 얼빠진 마음으로 빚을 내서라도 쓰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빚쟁이가 될까요? 아니면 부자가 될까요? 뻔하지요? 

자본주의 관점을 지닌 이들에게 이들의 말로가 뻔히 보이듯, 

공덕을 중요시여기는 가치관을 지닌 이들에게는 억념과 정지가 없이 얼빠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말로가 뻔히 보입니다. 

지금 이 순간 얼마나 행복한지, 부자인지, 건강한지... 의미 없습니다. 결국 복진타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스쿨은 최근 단일 교과서를 <입보살행론>으로 정했습니다. 이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며 정진하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자주 강조하는 말들이 상처가 된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뼈를 때린다고 표현 하더군요? 

그런데 과장 없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력결핍장애를 치료하지 않고 집중력이 좋아지는 방법이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을 벌지 않고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고 거짓말도 못합니다. 

마이너스 통장 신세를 탈출하지 않고 어떻게 빈곤에서 벗어나나요? 
진실의 말이 뼈를 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준비된 이들은 이 진실의 말이 용기가 됩니다. 

사띠의 선순환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익히고 있는 이들에게는 응원이 되고, 

억념과 정지로 삶을 개선하고자 발버둥 치는 이들에게는 인정 받는 느낌을 선사할 것입니다. 

공덕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인데, 

도대체 왜 이 진실이 뼈때리는 말처럼 느껴질까요? 

이는 행복의 길과는 반대 방향인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 아닐까요?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수행자는 부디 명심하시면 좋겠습니다. 

인색한 마음에서는 단 하나의 선도 자라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 그리고 자신의 소유물과 공덕까지 베풀 수 있는 것을 꼭 베푸는 연습을 해보세요. 

이를 통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열려야 삶이 개선될 가능성도 열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가능성을 잡으려면 삶을 바꾸는 열쇠인 사띠가 있어야 합니다. 

얼빠진 마음으로는 단 하나의 경험도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얼빠진 마음을 구원하는 깨어있음을 회복하고, 불안한 마음을 정돈하는 마음챙김을 활용해야 합니다. 

안심했다면 다가오는 경험에 전념하는 알아차림을 써야 하고, 

여기에 더해 기꺼이, 기쁘게, 환희롭게 경험에 몰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극락정토를 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억념과 정지를 배우고 익힌다면, 그 숙련도에 비례하여 삶은 사바에서 극락으로 개선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잔고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안심과 평화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으로 빨리 좀 바꿔 타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복진타락의 롤러코스터에서는 부디 내리시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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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수업40 스승을 알아보는 힘 #신독 #선넘으면지옥 #세상이곧붓다 

2) 정지(正知)를 보호하는 방편 – 호념(護念)
(1) 정념이 생기게 하는 방법
5:29 그러므로 억념이 마음의 문에서 결코 떠나게 해서는 안 되나니, 
     가령 잠시라도 억념을 놓치게 되면 악도에서 받을 고통을 생각하며 억념을 되찾아야 한다네.

#줄다리기

인간 몸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왜 한 번 인간 몸을 잃으면 다시는 이 기회를 잡기 어려울까요? 흐름을 탔기 때문입니다. 파멸의 흐름을.
항상 강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것이 아니라 파멸로 쓸려간다고. 

그렇기에 수행이란 결국 방일하게 쓸려가는 힘과 불방일하게 개선하는 노력의 줄다리기입니다. 

이를 인식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각된 의식과 자각되지 못한 무의식의 시소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줄다리기와 시소게임이라? 놀이터의 비유는 낭만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억념을 놓치면 얼빠집니다. 그럼 파멸로 쓸려 갑니다. 

반대로 억념하며 개선의 발버둥을 치면 파멸의 길에 저항하게 됩니다. 

인간이 반드시 죽는 이유는 이 흐름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요, 

한 번 잃으면 이 기회를 영영 잡지 못하는 이유도 이 줄다리기에 졌기 때문입니다. 

중생이 숨만 쉬어도 악업이 늘어나는 이유도 무의식에 의식이 잡아 먹혔기 때문입니다. 

줄다리기, 시소게임이라는 이 놀이만 잘한다면, 우리는 삶을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놀이를 잘 하려면 수행해야겠죠?

#선넘으면지옥

줄다리기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놀이입니다. 이를 스릴러로 묘사한 작품이 <오징어 게임>이죠. 

선을 넘어 패배한 이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니, 줄다리기는 일종의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입니다. 

방일함과 억념의 줄다리기도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찬가지입니다. 방일은 곧 지옥의 길입니다. 

억념은 곧 천상과 극락 그리고 열반의 길입니다. 

그럼 왜 우리는 이런 지옥의 줄다리기를 하면서도 마음이 급하지 않을까요? 선이 멀리 있어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송덕사는 얼리어답터입니다. 각종 최신 기계들을 구비하고 있죠. 

개인적으로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는 뇌파측정기입니다. 

대학병원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기계를 사용하는데, 

이를 통해 스트레스 소화 능력과 번뇌레벨 그리고 인지 속도 측정을 통한 치매 위험도 등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지표를 활용하여 인터뷰를 하면, 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와 신체의 상태에 대한 직접 정보로 

조금 더 정확한 판단과 해결책을 공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뇌파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에게는 고유 뇌파가 있고, 

이  뇌파가 반영되는 최소 기간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뇌파를 측정하러 오신 분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치매 위험군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죠?' 그럼 답변합니다. 
'고유 뇌파는 지문과 같아서 변화가 반영되는데 최소 반년 이상이 소요됩니다.'
이 시점의 차이를 사람들은 간과합니다. 지금 시점의 고유 뇌파는 최소 6개월 전 행위들이 반영된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노력 역시 반영되어 나타나는데 최소한 반년 이상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이 반년이라는 세월이 바로 뇌파의 기준에서는 선을 넘어 파멸하는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뇌파가 이러하다면, 삶의 경험이 지옥과 같아지는데는 조금 더 시간이 소요됩니다. 

파멸의 씨앗인 탐진치를 파종하면, 이것이 발아하여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세월이 필요하니까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얼빠져서 마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근자감이 넘칩니다.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도 만들지 않으면서도 그저 '나는 행복할꺼야! 나는 성공할꺼야!'라며 

허망한 망상만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낙관주의는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촉매일 뿐입니다. 

수행자는 인과에 맞지 않는 낙관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긍정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낙관과 긍정의 차이는 다들 아시죠?
파멸로 쓸려가는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분명히 기억하세요. 언제 선을 넘을지 모릅니다. 

알아도 자각 못 할 가능성이 높죠. 얼빠져 있으니.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선을 넘는 순간, 

어느새 이렇게 삶이 지옥으로 변화했는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삶은 지옥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얼빠진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머리에 불이 붙은 듯 급박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지옥행 열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입니다. 번뇌의 꿈에서 깨어나세요!
                 
5:30 스승과 함께 하고 법을 설하는 이의 가르침을 배우며 악도를 두려워하고 선연을 받드는 사람들에게는
     억념이 쉽게 일어난다네.                              
5:31 부처님과 보살들께서는 항상 어디에도 걸림 없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므로 ‘나는 항상 그 모든 분들 눈앞에 있다’라고,

#스승과제자

올바른 스승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편으로 제자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냅니다. "꿈깨!"
바람직한 스승의 덕목을 공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면 자비로운데, 그 지혜로운 말을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들은 흔히 스승의 지혜로운 말에 주목합니다. 물론 이 꿈깨라는 메시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승의 말을 자주 접하는 성문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이익 때문일 것입니다. 

자주 꿈깨라는 말을 들으면 경각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꿈깨려는 노력을 할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본받아야 할 것은 바로 멀리서 보면 위엄이 있다는 이 부분입니다. 

멀리서 본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스승이 홀로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항상 가면을 씁니다. 이 가면은 홀로 있을 때 벗어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 시간의 눈빛이 그 사람의 진면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조차 위엄이 있다면? 

이는 스승의 무의식의 흐름이 이미 도덕적으로 변화했고, 고요하며, 지혜롭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계정혜 삼학의 흐름이 습관화된 것이고, 원행보리심의 실천이 자동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밝은 깨어있음의 의식이 무의식과의 시소게임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독愼獨 

현 시대의 성인들은 철이 없습니다. 철 없다는 것은 의존성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정신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하며, 경제적으로 입벌이를 해결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스님, 저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느껴서 혼자 있는게 좋은데요?'
착각하지 마세요. 정말 혼자 있나요? 아니면 스마트폰과 함께 있나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내 뜻대로 안 되는 타인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겠죠. 

스마트폰 속 경험들은 어느 정도 내 통제하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정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요? 

타인도 스마트폰도 없이 혼자 있는 그 시간을? 
<대학>에서는 신독愼獨을 매우 강조합니다.

스마트폰이라는 질병이 탄생하기 전에는 과거의 시점으로 거슬러갈수록 혼자 있는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비율로 따졌을 때 함께보다는 홀로 있는 비율이 높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홀로 있으면서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그 시간의 중요성이 높았습니다.

그 순간의 경험을 바꾼다면 삶이 바뀌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에서 나타난 수행법이 바로 신독입니다. 
보살의 신독은 신앙의 요소가 더해집니다. 

혼자 있는 그 순간, 불보살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보살의 신독입니다. 

스승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면 우리가 얼빠져서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 아니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나요? 

스승님에게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스승이신 부처님과 함께 있다면 그 깨어있음의 질이 어떠할까요? 

이 신독의 마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파멸의 줄다리기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얼빠진 순간을 줄여갈 수 있으니.
                           
5:32 이와 같이 생각하면 부끄러움과 존경심과 두려움이 생기고 부처님에 대한 억념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네.

#세상이곧붓다

'붓다의 마음을 세상에 전하다'
붓다스쿨의 공통서원을 자주 강조하는 이유는 깨어있음의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너머에는 누군가 있습니다. 

벽이 혼자 있다는 착각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 분리된 공간에 사람이 없더라도 허공이 있고, 미생물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있고, 스마트폰 등으로 연결된 인연의 끈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은 어떤 순간에도 함께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신독의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더해볼까요? 세상이 곧 붓다입니다. 세상의 만물이 곧 붓다입니다. 만물을 담고 있는 기세간도 곧 붓다입니다. 

당신도 붓다이고,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모든 사람들도 붓다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365일 평생을, 

무한한 윤회가 이어지는 동안 단 한 순간의 예외도 없이 붓다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얼빠진 무의식으로 도망가 이 진실에 눈을 감았을 뿐입니다. 세상이 곧 붓다인데, 얼빠져도 되는 순간이 과연 있을까요?
정리하겠습니다. 중생의 삶이 파멸에 쓸려가고 있는 것은 디폴트입니다. 

이 기본조건에 저항하고 싶다면, 얼빠짐을 경계하고 자각의 힘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절대로 얼빠짐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머리카락이 불타고 있다는 마음으로 펄쩍 뛰어 불을 끄려고 발버둥쳐야 합니다. 

스승과 붓다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진실을 기억한다면, 깨어있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띠를 위해 애를 쓰면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줄다리기에 딸려가 선을 넘어 삶이 지옥으로 변화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경험 아닌가요? 부디 꿈깨시길_()_

 

삼보에 귀의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