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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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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회차 가을정진 75일 (5679일)

 

몽둥이 앞에서는 모두가 벌벌 떠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견주어 본다면 남을 때리거나 때리게 해서는 안되리.
<법구경이야기>

 

https://youtu.be/AHZltKGh8vE

 

행복경

감관을 수호하고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다

 

왕생게 1송
저는 수다라의 진실한 공덕의 모습에 의지하여 원생게를 설하고 총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응하고자 합니다
밝게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_()()()_

 

입보살행론 120일차

 8:91 우리 몸에는 팔다리와 같은 여러 부분이 있지만 이들 모두가 우리가 보호해야 할 하나의 몸이듯이,
세상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보호해야 할 한 사람이라네.

(2) 자타를 평등이 관하는 사유 방식
가. 자타를 평등이 관할 수 없다는 설을 논파한다
8:92
내가 겪는 고통이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므로 나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한다네.

8:93
마찬가지로 내가 남들의 고통을 그들과 똑같이 겪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들을 귀하게 여기기에 그들의 고통을 나는 견디기 어렵다네.

나. 자타를 평등이 관하는 것이 성립하는 이유
가) 널리 설한다
8:94
그러므로 나는 남들의 고통을 없애야 하리니 그것은 나 자신의 고통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며
나는 남들에게 행복을 주어야 하리니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네.

8:95
나와 남이 모두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데
우리들을 차별할 무슨 차이가 있다고 나는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가?

밝게 깨어있기 나무아미타불 _()()()_

 

담큐 172 양이 쌓이면 질이 변화한다

3중장애인 임에도 위대한 삶을 살았던 헬렌 켈러 역시 ‘집중독서’ 기간이 있었다.
아인슈타인, 처칠,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 ‘집중 독서의 법칙’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 조건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양良이 질質을 낳는다.     -<48분 기적의 독서법> 중-
양이 질을 낳는 과정은 두뇌의 변화와 동반됩니다. 두뇌는 먼저 생각의 회로를 까는 작업을 합니다.
마치 국토에 도로를 내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작업을 지속하다 보면 국토의 대부분이 사통팔달의 요지가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각각의 지식과 각각의 영역들이 소통이 원할해지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기억이 창의성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없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으로 다양한 지식을 통섭하여 새로워 보이는 지식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은 반드시 지식을 새기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두뇌는 활용할 지식이 없으니까요. 너무 많이 알면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건 너무 많이 안 다음에 걱정하는게 어떨까요?
그 중간 과정에서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단 알아야 버릴 것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변화는 양이 넘처 흐를 때 시작됩니다. 변화를 맞이하고 싶다면 일단 빈 잔을 채우는 일을 하세요.
2023.11.13 오늘도 붓다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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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전 <입보살행론>

5:109 우리는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나니 거기에 대해 읽기만 하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치료에 관한 의학서를 읽고 듣는 것만으로 병든 이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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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동영상
죽음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ㅣ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ㅣ 강영안 지음
https://youtu.be/vJfwUNT0AS0

 

보살수업24 #결국죽음 #결국혼자 #결국자유 #세가지죽음 

(3) 죄업과 죽음의 두려움을 사유하며 뉘우친다
2:39 밤낮으로 끊임없이 저의 생존은 줄어만 가고 수명은 결코 늘어나는 법이 없으니 제가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으리까?
2:40 제가 임종의 침상에 있을 때 친척이나 친구가 둘러싸고 있어도

숨이 끊어지는 죽음의 고통은 저 혼자만이 겪어야 하나이다.                  
2:41 염라왕의 사자에게 붙잡혔을 때 친척이나 친구가 무슨 도움이 되리까.
     그때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공덕뿐인데 그것마저도 저는 쌓지 못하였나이다.

#결국죽음 

중생의 삶이라는 포맷은 매우 단순합니다. 사실상 똑같습니다. 생에서 시작하여 사로 끝난다는 점, 

명백한 공통점입니다.  결국은 그 끝에서 모두 죽습니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수명은 늘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명료한 진리를 주관적으로는 인식도 하지 않고, 

인정도 하지 않고 싶어할 뿐입니다. 생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중생은 모두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결국혼자

중생 삶 속에서 중간의 모습은 개성이 조금 인정됩니다. 천차만별의 모습으로 태어나, 

만가지 관계를 형성하며, 무한한 감정을 경험하며,  갖가지 선택으로 이루어진 개성적 삶을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다채로움에 중독되어 생사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삶의 중간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괴로움, 외로움과 따뜻한 관계의 기쁨, 

성취감과 실패의 무력감 등이 지나고 보면 모두 다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거 아세요? 삶의 중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랑과 우정을 나눴든 관계 없이 그 끝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잔인한 범죄에 해당되는 

'순장'의 문화들은  결국 이 혼자임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습니다. 

하지만 망자의 옆에 누워 함께 죽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죽음은 혼자 경험합니다. 

산처럼 쌓아 놓은 금도 가져가지 못하고, 진정으로 망자를 따르는 가족과 친구들도 함께 하지 못합니다. 

따라오는 것은 단 하나, 생전에 지은 '업보'뿐입니다. 그 끝은 이렇게 정해져 있는데, 왜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억을 못하니... 그 끝의 업보에 불리한 악한 행위들만 반복하며 마지막 순간을 파멸로 장식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결국 혼자인 것을.

#결국자유

불자의 세계관에는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 상식선의 생사입니다. 이 몸이 죽는 순간이고,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그 끝이 끝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생사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불쌍한 죄수들은 업보에 따른 경험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죠. 우리는 무한한 윤회라는 감옥에서 무한한 생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둘째, 찰라생사입니다. 중생이 겪는 환영 같은 경험은 64프레임입니다. 

요즘은 모니터의 성능이 참 좋아져서 120프레임을 구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간 단위는 찰라인데, 이 찰라는 64분의 1초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의 경험은 1초에 64번 깜박입니다. 

이 깜박이는 순간마다 새로운 프레임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프레임은 단 한 장도 동일한 장면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상이라고 하고, 

이 무상의 의미는 매 찰라 우리는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이 찰라생사의 연속체가 바로 중생입니다.
셋째, 종결생사입니다. 말 그대로 생사를 종결한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생사는 우리에게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환상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죽음은 바로 이 종결생사입니다. 종결되는 순간? 우리는 열반에 도달합니다. 

해탈하여 윤회의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생사에 묶인 원인인 생존 본능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었으니 생존의 본능이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찐죽음이고, 아라한으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이 경험 이후 모든 아라한들이 불사의 문을 통과했다는 확신과 함께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끝났다!"

#세가지죽음

중생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결국 혼자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관점, 무한한 삶을 펼쳐놓고 본다면 결국 자유라는 끝은 다가옵니다. 

붓다는 깨침을 얻은 후 매우 기뻤습니다. 

드디어! 자신은 불사의 문을 열고 자유로워졌고, 세상을 향해 불사의 문을 열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문'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문을 열어주는 법입니다. 무슨 문을 열까요? 진리의 문? 

아닙니다! 붓다는 진리를 찾는 배부픈 철학자가 아닙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증득하는 것, 이 과정의 핵심인 불사의 문을 열어주는 가르침이 바로 법문입니다. 

법문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짜 죽음 말고 찐죽음인 열반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세 가지 죽음을 기억하세요. 결국 죽게 되니 잘난척 하지 마세요. 

결국 혼자이니 환영 같은 삶에 대한 집착으로 악업과 범죄 좀 그만 저지르세요. 

그리고 결국에는 찐죽음인 자유에 도달할 수 있으니 법문을 열기 위해 수행하세요. 

이것이 오늘 죽음에 대한 세 가지 뉘앙스였습니다.

 

삼보에 귀의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