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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에 귀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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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카페 : 붓다스쿨

 

보살수업 #지속과증장 #안락행 #서원과다짐 #기둥세우기 #글쓰기 

Ⅲ. 결론적으로 보리심을 찬탄한다
       1. 기쁘게 보리심을 획득하는 것을 사유한다
3:25 그러므로 지혜를 갖추신 분들은 순수한 마음에 의해 보리심을 일으키고
        그것을 유지하고 더 넓게 키우기 위해 마음을 다음과 같이 북돋우셨나이다.

 

#지속과증장

 

보리심은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듣는 것조차 어려운 희유한 마음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실천하는 보살이 극소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희유한 보리심을 듣고,

단 한 번이라도 보리심에 흥미가 생겨 원보리심을 일으켰다면 그 공덕을 위대합니다.

잠시 뒤 그 원보리심을 잊어버렸다고 해도 말입니다. 마음에는 이미 보리의 씨앗이 파종되었습니다.
원보리심을 일으킨 이들 중 행보리심으로 나아가는 이들은 극소수입니다. 

대개는 보리심이라는 마음을 알아갈수록 점점 더 그 압도적 부담감에 의해 일으킨 서원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원보리심을 유지하고 있다면 정말 대단한 마음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더 증장시키고 있다면 희유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위대함과는 별개로 아직 종자가 자라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용기 내어 행보리심을 실천하는 순간, 보리의 씨앗은 압도적 힘을 지닌 대지를 뚫고 싹을 틔워 자라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한 번이라도 일으킨 것, 훌륭합니다. 조금 더 욕심내자면 유지하면 더 대단한 것입니다. 

더 욕심내면? 용기 내어 행보리심을 실천하고 지속하고 증장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비결입니다. 보살은 그 뿌리가 보리심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이를 지속하고 증장시켜 끝까지 완성할 것인지만 숙고하고 연구하면 됩니다.  

3:26 이제야말로 저의 삶은 열매를 맺고 인간 존재의 큰 의미를 이루었으니
        오늘에서야 부처님의 가문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자손(=보살)이 되었나이다.

#안락행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의 삶은 그 끝이 성불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단 하나의 변수를 제외한다면 보리심을 포기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수행이 정체되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보리심을 일으킨 것을 후회하여 참회한다면 그 종자가 타버릴 수 있습니다. 

이 단 하나의 변수만 아니라면, 결국 이 보리종자는 인과연을 만나는 순간 싹을 틔워 자라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불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말입니다.
보리심을 듣고, 배워서, 원보리심을 일으키고, 행보리심을 훈련하는 것은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이미 그러하고 계시다면 축하할 일이고, 기뻐할 일이며, 안심해도 좋은 일입니다. 

무한한 윤회를 반복하며 허비한 세월을 거름삼아 드디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을 지니면, 이를 모태로 비불자가 불자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나아가 원보리심을 일으키면 이를 모태로 삼아 불자가 보살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거지가 왕자로, 왕자가 태자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이것만으로도 마땅히 기뻐하고 안심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붓다의 자손인 보살의 태도인 안락행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편안한 안심을 근본으로 삼고, 

꺼이 기쁘게 힘 있는 태도로 경험을 이어가는 것이 바로 안락행입니다.

3:27 이제 저는 무엇을 하더라도 이 고귀한 가문에 맞는 일을 하며
        허물이 없고 고귀한 이 가문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겠나이다.

#안락행

저는 출가한 후 일명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봤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자녀교육을 목격했습니다. 

금수저라고 불리는 그들은 어떤 교육을 받을까요? 모두가 그러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자녀교육은 매우 매우 엄격했습니다. 

특히 자산의 단위가 커질수록 교육의 엄정함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숫가락 드는 것부터, 걸음걸이까지 모두가 교육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모든 '잔소리'같은 교육을 통해 얼빠진 채 방일하게 생활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만났던 2세들은 대개가 눈빛이 살아있었습니다. 깨어있음의 힘이 좋았죠.
보살은 법왕인 붓다의 아들입니다. 즉, 법왕자입니다. 

특히 보살은 다른 모든 불자들과 달리 성불이 더욱 빠르게 확정되어 있는 태자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태자교육 역시 매우 엄정하지 않겠습니까? 부담을 가지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담을 줄여드릴 방법인 '안락행'의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안락행의 시작은 안심입니다. 안심이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요소의 합일입니다. 

첫째, 얼빠진 상태에서 벗어난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누가봐도 얼빠진 상태를 안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둘째, 소화되지 않은 감정과 망상으로 인한 혼란한 마음이 마음챙김의 힘으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혼란한 마음이 가벼워지고 명징해진다면 이것이 안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심은 근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경계를 만나며 살아가기에 항상 안심한 채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안심은 목적지이기도 하지만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안심했다면 이제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안심했다면 이제는 기쁘게 삶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것을 대상과 경험에 대한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평소에 반복 설명했던 사띠의 선순환입니다. 

깨어있음과 마음챙김인 깨마는 안심을 만들고, 알아차림인 알은 전념을 낳습니다. 

보살의 태도인 안락행의 기준으로 하나를 더 하자면 바로 '락' 즉, 기쁨입니다. 

다가오는 경험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기쁘게 환희롭게 전념하고 집중하며 몰입하는 것이 

바로 안락행입니다. 이 안락행을 줄임말로 정리하면 '깨마알락'이니 참고하시면 기억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서원과다짐

보살은 붓다의 고귀한 가문에 어울리도록 위엄있고, 위대한 행위를 실천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를 억지로 익히는 교육 방식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살의 고귀함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안락행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문제는 이 안락행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안락행 자체는 불가능한 난이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안락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습관화 하지 못합니다. 

그럼 기억하더라도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지속이 잘 안 됩니다. 

그렇다면? 기억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새로운 행위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극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안락행을 기억할 수 있도록 신호를 만들어보세요. 

'고귀한 가문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겠다!'는 다짐을 적어서 이곳 저곳에 붙여놓아보세요. 

'안락행'이라는 단어도 여기 저기 적어두세요. 스마트폰 바탕화면에 넣으셔도 좋겠네요? 

또한 심호흡 하는 습관에 '깨마알락'이라고 되내이는 방법을 붙여도 좋습니다. 

갖가지 방법으로 스스로의 마음에 리마인드 해주세요. 나는 고귀한 가문의 일원인 보살이고, 

보살은 안락행을 하는 존재이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깨마알락을 지금 당장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게 안심을 준비하고 기쁘게 기꺼이 경험을 이어간다면 이미 충분히 고귀함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28 맹인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귀한 보배를 발견한 것처럼
        그와 같이 희귀한 행운으로 이 귀중한 보리심이 제게 생겼나이다.

#기둥세우기 #글쓰기 

이 보리심 공부는 시간을 투자하는 다양한 공부 주제 중에서도 가장 롱텀의 시간투자 대상입니다. 

1년? 2년? 이런 단위가 아닙니다. 이번생을 놓고 본다면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뭐,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요? 

평생을 안심을 연습하며, 기꺼이 기쁘게 경험에 전념하는 훈련을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단 하나의 변수인 후회입니다. 포기해도 좋지만 만약 후회한다면 보리심을 참회하게 될 것이요, 

그럼 이 보리심의 종자는 힘을 잃습니다. 

맹인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찾은 이 희귀한 다이아몬드를 한 번 잃는다면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보리심이라는 공부에 장기투자를 이어가는 것의 본질은 바로 자기설득입니다. 

이 선택을 후회하는 의심이 일어날 때마다, 

보리심의 이익을 되새기고, 내 삶의 변화를 확인하며, 세상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상기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새롭게 공부하며 마음 속 의심과 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후퇴하는 마음을 설복시켜야 합니다. 

끝 없이 자기설득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정신의 기둥을 세우는 것입니다.  확고부동한 보리심의 서원에 

삶을 정렬시키는 것이고, 그렇게 힘 있는 보살행을 예외없이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정신의 기둥을 세우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도구는 바로 글쓰기입니다. 

물론 글쓰기라는 아웃풋은 보리심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는 '성문'의 인풋을 전제로 합니다. 

항상 새로운 법문을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정신의 영양소인 양질의 정보를 먹었다면 

이를 소화시키는 아웃풋의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세상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리심에 대한 글쓰기, 보리심의 희유함에 대한 글쓰기, 보리심의 필요성과 보리심의 위대함, 

보리심의 실천 방법 등에 대한 모든 글쓰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보리심이라는 개념에 종교성이 묻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보리심은 그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가장 완벽한 시스템에 대한 주제입니다. 

인간완성에 이른 그 존재를 보살이라고 하든, 붓다라고 명칭하든, 하나님이라고 하든, 예수라고 하든, 

성인이라고 하든, 군자라고 하든... 뭐든 다 좋습니다. 명칭은 명칭일 뿐이니 말입니다. 
본질은 인간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완성으로 이끄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수 많은 스승들이 개인의 완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길을 언급했지만, 

세상 모두를 완성으로 이끌어 돕는 방법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보리심은 더욱 희유하고 가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중생을 모두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마음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그런 방법을 누가 알려줄 수 있었나요?
보리심 공부를 끝까지 지속해야 합니다. 항상 못하겠다고 후회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얻었던 이 보리심이라는 귀한 보석은 버린 채 가치 없는 돌멩이를 구걸하러 다니던 거지의 삶은 이제 끝내야 합니다. 

이번에는 보리심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배우고 끝없이 글쓰기를 반복하세요. 

언제까지? 정신의 기둥이 설 때까지입니다. 나아가 그 기둥이 바로 보리심이라는 '법'의 성격이 될 때까지입니다. 

지혜로움은 이렇게 땀흘리고 시간을 들이며 정직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갑자기 공짜로 지혜로워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두시길.

 

보살수업 #방일 #오랜세월축적된우연  #무상의법칙 
   
(3) 방일은 가만(假滿)을 쉽게 잃게 한다

4:15 여래께서 출현하시는 일과 바른 믿음을 갖는 일과 인간의 몸을 얻는 일,
     선업을 닦는 일 등은 너무도 희유하고 귀한 것인데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오.

#방일

방일과 해태를 아직도 구분 못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해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게으름과 유사한 뉘앙스입니다. 

반면 방일은 깨어있음이 없는 얼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게으름과 그 결이 다릅니다.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얼빠져 있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해태보다 더 피해가 극심한 것은 방일입니다. 

흔히 게으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자신을 이렇게 핑계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이 말도 물론 진실이 아닙니다. 사바세계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파멸로 쓸려가기 마련입니다. 

이미 '탐진치'라는 파멸의 흐름이 강렬하게 형성된 사회니까요. 하지만 방일하면 이 흐름이 더 빨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빠져서 노력하기에 파멸로 더 빨리 달려가는 경우도 흔하니까요. 

방일함은 노력하여 축적한 재산과 인간관계, 건강과 성공 등을 한 순간에 빼앗아 갈 수도 있는 

다양한 실수를 유발합니다. 왜 그럴까요? '얼빠져' 있으니까요.

#오랜세월 축적된 우연

원보리심을 일으킨 것은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오랜 세월의 공덕이 먼지 쌓이듯 축적되고 축적되기를 끝없이 반복하여 산을 이룬 결과입니다. 

물론 한 순간의 방일함으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논전에는 맹인 거지가 쓰레기더미에서 보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확률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왜 도대체 원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이런 극악한 확률일까요?
거꾸로 역추적 해보겠습니다. 원보리심을 일으키기 적절한 조건은 선남자선여인입니다. 

선남자선여인의 적절한 조건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입니다. 

여유가 없다면 원보리심은 커녕 평범한 수행과 공부 그리고 기도조차 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해지는 것을 사람된다고 표현합니다.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사람구실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되고 사람구실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요?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무한한 윤회를 반복하는 동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자주 반복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윤회를 헤매는 동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기적이요, 사람이 되어 심신이 건강해지는 것도 기적이며, 

한 사람으로 구실하는 것도 기적이요, 선남자선여인이 되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선남자선여인이 되어 불법 만나는 것도 기적이요, 불법을 만나 신심을 일으키는 것도 기적입니다. 

신심을 일으켜 배우기 시작는 것,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도 기적이요, 

그 과정에서 보리심에 대해 듣는 것만해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것은 도대체 기적을 몇승 곱한 것인가요? 

이 무한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시나요? 

그 동안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의심을 이겨내며 축적하고 축적한 우연이 만들어낸 이 희유한 기회를 

방일함에게 도둑맞아 버리실건가요?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얼마나 오랫 세월을 다시 돌고 돌고 돌고 돌아야 할까요? 

잃어버리면 진짜 돌아버릴지도 모릅니다.

4:16 비록 오늘은 병 없이 건강하고 먹을 것이 있고 역경이 없다고 하더라도,
     삶은 순식간에 바뀔 수 있으며 내 몸은 한순간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네.

#무상의법칙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합니다. 모든 죽음은 갑작스러운 것이니까요.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병에 걸렸다고 느껴집니다. 

<금강경>에서는 중생을 사로잡는 대표적인 고정관념 4가지를 언급합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입니다. 

이 중 수자상은 목숨이 남아 있다는 착각입니다. 100세 시대라고 말을 하지만, 누구나 100세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10세이전, 20세... 언제나 죽기 가장 좋은 순간입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게 인간이지만, 모든 범부는 '나는 그 때까지는 살겠지?'라며 자신을 속입니다. 

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해태해지고 방일해지는 것입니다. 
무상의 법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밭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항상 반복해서 사유해야 할 네 가지 주제가 있음을 자주 강조했지만 또 말하겠습니다. 

- 첫째, 인간 삶의 희유하고 소중한 여가와 기회입니다. 부디 이 귀한 순간을 거지 같이 쓰지 마시길. 

- 둘째, 윤회계의 불만족스러운 본질입니다. 소중한 기회를 날린다면 이제 무한한 세월 다시 불만족스러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를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 셋째, 카르마의 법칙입니다. 고통과 행복을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입니다. 타력의 개입은 결단코 없습니다.

오직 카르마 즉, 업에 스스로를 묶는 자승자박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여 삶을 개선해야 합니다.

- 넷째, 죽음과 무상입니다. 삶을 개선해나가는 수행의 노력을 미루지 마세요.

한 번 미루면 두 번 미루고, 세 번이 네 번... 결국 죽을 때까지 미루게 됩니다. 
출가한 이후 20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삶을 목격했습니다. 정말이지 각종 핑계로 미루더군요. 

보리심을 요구한 것도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수행도 아니고, 막중한 공부도 아닙니다. 

그저 하루 15분 또는 1시간만 온전히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수행해보는 것이 어떠한지를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몇 살 되면 할께요, 딸 대학만 들어가면 할께요, 

애들 결혼시키고 할께요, 은퇴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시험만 끝나면... 이것만 된다면...'
결과가 어떨까요? 한 번 미룬 사람은 결국 계속 미룹니다. 미루고 미루던 분들 중에는 돌아가신 분들도 계시는데, 

알기로는 결국 끝까지 수행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후회합니다. 

그 때부터라도 수행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습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죠? 

숫가락 들 힘도 없는 그 순간에는 지극히도 효율이 오르지 않습니다. 

10년 전에는 쉬웠던 일이 이제 극악한 난이도의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니까요.
남은 시간? 없다고 생각하세요.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판단해보세요.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과연 그 사소한 일들을 위해 이 귀한 시간을 버려야 하나요? 원보리심, 수행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무상의 법칙을 기억하는 것이 수행을 지속적으로 선택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좋을 때 잘해야 합니다. 아시죠?